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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ch5rong 2023. 8. 14. 15:33

기독교의 가르침을 잘 모르거나 한동안 거기서 떠나 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는 입문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새롭게 깨닫고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을 알고 싶어 하는 외부인과 내부인, 즉 예수님이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둘째 아들’(동생) 부류의 사람들과 ‘맏아들’(형) 부류의 사람들 양쪽 모두를 위한 것

1.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아오는가_ 
예수님의 가르침에 앞서 우리는 저자가 제시한 역사적 배경부터 눈여겨보아야한다.

예수님의 취지는 좌중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범주를 허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죄, 구원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하신다.

우리의 설교와 행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예수님과 같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지 않은 것이다


2.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_
동생을 도로 집안에 들임으로써 아버지는 그를 다시 상속자로 삼아(이미 확 줄어든) 가산의 3분의 1에 대한 권리를 주었다. 형의 계산으로는 이는 천만부당한 일이다. “나는 죽도록 일해서 내 몫을 벌었지만 그는 한 일이 없으니 번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쫓겨나 마땅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돈을 퍼 주시니 도대체 정의는 어디로 간 겁니까?”
그래서 형은 자신의 이력을 내세우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권리가 있습니다! 이번 일에 나도 의견을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아버지 혼자 일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실 권리는 없습니다.”
이렇듯 형은 홧김에 아버지를 무례하게 대하기까지 한다. 그 문화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는 극진히 예를 갖추어야 했고 특히 남들 앞에서는 더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재정의하신다.

 


 
3.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비유에 나오는 형제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길을 보여 주신다.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아 발견의 길이다. 둘 다 인생관에 색깔을 입히는 렌즈이자 세계관을 형성하는 틀이다. 둘 다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길이고, 세상의 악을 해결하는 길이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길이다.

물론 간혹 넘어질 수도 있으나 그럴 때 우리가 심판받는 기준은 얼마나 비통하고 간절하게 뉘우치느냐는 것이다. 이 관점대로라면 우리는 실패한 와중에도 늘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그와 아버지를 갈라놓은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이력에 대한 교만이다. 그를 아버지의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 건 그의 악이 아니라 의다.

둘째 아들이 삶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가산의 지분에 대해 아버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게 못내 싫었다. 스스로 결정해 자기 몫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 뜻을 어떻게 이루었는가? 대담한 강공 작전을 폈다. 지역사회의 규범에 보란 듯이 저항해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맏아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잘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그가 원한 것도 동생과 똑같았다. 그도 동생 못지않게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다. 그도 아버지보다 아버지의 재물을 원했다. 다만 동생은 멀리 떠난 반면 형은 옆에 남아 ‘명을 어김이 없었을’ 뿐이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방식만 달랐다. 그는 무언으로 요구했다. ‘나는 아버지께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내 인생의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았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다. 다시 말해서 두 아들 모두 반항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이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게 오히려 그분께 반항하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니.

비유 속 형의 태도

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삶 속에서 정말 원하는 것들을 그런 식으로 그분께 받아 내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덕적 비행을 사실상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도 가장 방탕하고 부도덕한 사람 못지않게 영적으로 철저히 잃어버려진 상태일 수 있음을 보여 주신다.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몰아내려던 두 아들처럼 말이다.

눈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형 같은 바리새인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행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이렇게 반응한다. “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교회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항상 교회에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찍이 이렇게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그분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었다.


영적으로 잃어버려진 상태란 무슨 뜻인가? 이 비유에서 ‘동생의 잃어버려진 상태’는 그의 종착지가 된 돼지우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무절제하고 어리석은 방종 행위 때문에 친구와 돈과 자원이 다 바닥났다. 삶이 완전히 무너졌다. 마침내 동생은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깨닫고 돌아가 삶을 재건하려 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또 다른 종류의 잃어버려진 바 된 상태를 깨우치기 원하신다. 더 미묘하지만 똑같이 참담한 상태다. 죄에 대한 예수님의 더 깊은 정의를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이것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이를 일컬어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라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충실하려면 어느 정도 의무감이 필요하다. 꼭 해야 할 일인데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면 우리는 대개 성실하기 위해서라도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이 형은 오로지 의무감 때문에 아버지에게 순종했음을 보여 준다. 기쁨이나 사랑은 간곳이 없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만으로는 보상이 안 된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교만, 정죄, 염려, 정서 불안, 기쁨 없음, 분노 등에 쉽게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5.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_
그분은 바리새인을 대하실 때 바리새인과 같지 않으시고, 자칭 의인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으신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완고한 종교적인 사람들도 사랑하신다.


만일 자신의 길 잃은 상태가 점차 느껴지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갈망이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에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형을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

형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

그동안 자신의 궁극적인 소망과 신뢰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두었으며, 잘못된 행동과 올바른 행동 모두를 통해 하나님을 피하거나 통제해서 그 다른 것들을 얻고자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안식하고,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경이롭게 바라봐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동생이나 형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6.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다 유랑자로서 늘 집을 그리워한다. 늘 떠돌이일 뿐 결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건물은 도중에 묵어가는 여인숙일 뿐 집은 아니다. 집은 자꾸만 저만치 멀어져 간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한 나라를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죄와 악과 죽음 자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인류를 본래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분은 강함으로 오지 않으시고 약함으로 오셨다.
그분이 오셔서 겪으신 유랑은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축출되어 우리 대신 영적 소외라는 극한의 절망과 어둠 속에 내던져지셨다. 인류의 반항에 대한 모든 저주와 우주적 실향을 친히 당하셨다. 우리를 진정한 집으로 맞아들이시기 위해서.


7.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다 
 예수님의 궁극적 목적은 개개인의 구원과 죄 사함만이 아니라, 또한 이 세상을 새롭게 해 질병과 빈곤과 불의와 폭력과 고난과 죽음을 종식하시는 것

식사는 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성장을 촉진한다. 성찬식이라고도 하는 주의 만찬 역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게 한다. 인간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각자가 꾸준히 먹고 마셔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같이 해야 한다. 그것을 각자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하며, 점점 더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에서 영적으로 자랄 수 있다.

종교는 ‘나는 순종한다. 고로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라는 원리로 작동한다

인색함을 해결하려면 그리스도의 베푸심이 있는 복음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분은 자신의 부를 당신에게 쏟아 부으셨다. 당신은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시고 철저히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은 당신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놀라운 신분을 부여한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종착점이다. 우리의 문제들은 다분히 우리가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 그것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