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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셋 주일학교-박양규

ch5rong 2023. 9. 20. 13:29
  •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주일학교 교역자 한 사람, 교사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나의 진짜 대안이었다.’
  • 왜(Why) 우리가 주일학교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어떻게(How) 주일학교를 운영해야 할 것인지를 부서의 매뉴얼을 통해 설명하고, 신앙교육 콘텐츠로서의 인문학을 소개하며 무엇(what)을 가르칠 것인가
  • ? 한 사람이 바꿀 수 있어야 진짜 대안이다.
    ? 변화는 반드시 본질을 기초로 해야 한다.
  • 설교 수준을 달리 해야 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설교와 공과를 어떻게 해야 아이들에게 효과적일지 지침을 나누려고 한다
  •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하기 위해 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은 콘텐츠와 매뉴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간절함이다. 그게 내 진심이다.
  • 주일학교 문제점을 제시하고 우리 개인의 인식 전환에 대해 다뤘다. 개인의 시각이 변해야 비로소 공동체로 의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Part1.

  • 어떤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예산 집행자가 아닌 우리가 바꾸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공과공부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일도 병행되어야 한다.
  • 우리 자신이 변화의 필요성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공동체의 성장과 변화를 말할 수 있다. 인식을 바꾸자.
  • 지금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아이들은 교회의 현존하는 미래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가슴 뛰는 말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일학교를 고민하고 있는가, 왜 주일학교를 섬기고 있는가?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왜’라는 질문은 사명이다. 이 질문은 지금까지 주일학교를 섬기면서 배운 어떤 방법론이나 노하우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얼마나 이 질문을 던지는가. 이 질문은 사명을 공감하게 하려는 것이다.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명을 알아야 목표와 방법이 생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이고, 왜 남겨야 하는가?
  • 한 사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지만 그 사람이 만든 제도는 두고두고 역사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것이 제도의 힘이다.
  • 우리가 조직을 떠나고, 무대에서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남긴 제도는 그곳에 흔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 우리가 주일학교에 소속된다면 우리 역시 그 부서가 그동안 운영해 온 방식에 따르게 되고,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난다고 해도 또 누군가가 그대로 이어받아 활동하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주일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주일학교가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가. 과연 우리가 왜 주일학교에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의문을 갖지도 않았다. 교사로의 부르심, 이것은 사명이다. 사명이라고 고백할 때 문제를 인식하고 방법과 방향을 질문할 수 있다.
  • 어떻게 교사 스스로 사명이나 자신의 역량을 점검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따른 신앙 훈련을 고민할 수 있겠는가. 사명 없이 교사의 자질은 무색해진다.
  • 왜?라는 질문은 방향을 만들고, 방법을 위해 제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사명과 제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확고한 사명과 명확한 방향이 없었으므로 주일학교는 관행으로 움직여 왔고, 자연스럽게 방향을 상실해 오늘의 침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의 교역자가 제시한 방침은 다음 교역자에 의해 폐기되기도 하고, 그 한 사람이 바뀌면 조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들이 공감하고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제안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착화된 관행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까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설령 교사들의 열정이 높아지고, 교회 리더십의 관심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주일학교의 동력으로 작용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 기획하고 제안한 한 사람의 부담으로 부메랑이 되고 만다.
  • 형식이 내용을 반영하는 그릇이라면 제도는 사명을 담아내는 나침반이다. 사명은 마음에 존재하는 무형의 것이기에 보이지 않지만 제도는 담당자가 떠나더라도 유형의 흔적으로 계속 남을 수 있다. 결국 교사로서의 사명을 조직 속에 남기는 흔적이 제도이고 매뉴얼이다.
  •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것 중의 하나가 모든 주일학교가 보편적인 사명을 담아내는 제도와 매뉴얼을 남기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질문, WHY?
  • 왜 우리는 주일학교를 섬기고 있는가? 물론 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봉사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더러는 청년이라는 이유로, 자녀를 양육해 봤다는 이유로, 혹은 직업이 학교 교사나 학원 강사라는 이유로 ‘어쩌다 보니’ 주일학교와 엮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만약 후자 쪽에 속하는 교사라면 지금이라도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보자.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할지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 주일학교는 말씀과 기도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의외의 메시지였다. 왜 우리가 주일학교를 섬기는지 그 질문이 없다면 말씀과 기도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 다윗이 사자나 곰에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방법이 아니라 왜 양 떼를 맡고 있었는지의 문제였다. 그 대답이 명확했으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양 떼를 지킬 수 있었고, 골리앗에 대항할 수 있었다.
  • 주일학교의 방법이 대안으로 가볍게 외쳐지는 시대다. 관점을 전환하고 질문을 바꾸자. 그럴 때, 시대의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우리의 눈에 새로운 ‘돌멩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주일학교를 바꾸는 요소는 환경과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이들과 직접 대면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맞추어 바꿀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 필요한 것은 교사들의 공감뿐이다.
  • 교육학계에 있어 연령별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어떤 특징이 있으며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등 연령별 발달 특징에 대해 아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주일학교 교사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할 내용임에 틀림없다.
  • ‘1만 시간의 법칙’을 아는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법칙이다.
  • 교사 한 사람이 마중물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우리가 섬길 다음 세대에 대한 분명한 ‘인재상(人材像)’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에 오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인재상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답해 보자.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다.
  • 우리 부서가 양육하려는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논의를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공론화했다는 것은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담당 교역자와 교사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인재상이 다른데 어떻게 주일학교의 목표와 제도가 명확해질 수 있겠는가.
  • 배가 아무리 나침반과 돛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목적지가 없다면 그것은 항해가 아니라 표류일 뿐이다
  •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이를 고민해 보고 부서의 교사들과 이야기해 보자. 우리 교회, 우리 부서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우리를 통해 아이들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서로 질문할 수 있다면 비로소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의 기준은 무엇인가? 주일학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 양적 성장과 물질적 획득을 부흥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교회가 인식하는 가치의 기준들이 바벨탑의 잣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 주일학교 존재 목적

  • 주일학교는 한 시간 동안 진행되지만 일상을 바라보며 모든 삶이 예배라고 선포하며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붙잡는 1시간은 교회를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간 168시간을 위한 시간이다. 그것이 주일학교의 존재 목적이다. 성만찬이 삶 속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교회는 형식만 남는다. 우리는 어떤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에 감탄하고 있으며 무엇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우리의 가치가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그루터기 같은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닥불을 큰 불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 그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 우리는 본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어떤 핵심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가? 우리의 주일학교는 정말 성경을 충실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 주일학교는 과연 내세울 만한 가치가 있는가? 두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교회는 적어도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아이들 삶의 구심점이었고, 문학의 밤은 경쟁력을 갖춘 문화 콘텐츠였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주일학교를 회복할 수 있을까. 평신도 레이크스의 시선으로 우리의 주일학교를 살펴보자.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 나갈 수 있을지, 그것부터 하나하나 착수해 보자.
  • 교회에서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명확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절실하다. 그럴 때 주일학교는 식어 버린 기대감을 회복할 수 있다.
  • 주일학교의 가치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다.변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관행일 것이다. 변화의 시작은 관행을 버리는 것이고, ‘이전부터 쭉 해 왔던 대로’라는 상식도 버려야 한다.이제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아이들의 입장에서 주일학교를 평가해 보고, 회복해야 할 원형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이들이 문명의 부속품이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인격체라고 인식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여기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3 공장 가동은 이제 그만!
  •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서는 아니, 우리 아이들은 성령을 알고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거듭남의 의미와 구원의 확신을 이해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공부하고 학원 다니기도 바쁜데 무슨 말이냐는 생각이 드는가? 그런 건 대학에 들어가서나 하는 말이라고 외치고 싶은가? 이런 인식으로 아이들을 대했다면 아이들은 두 번 다시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크다.
  • 헌신된 교사는 있으나 그들이 아이들에게 본질을 제대로 가르칠 교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 흔히 질병은 습관에서 온다고 한다. 평소에 무엇을 먹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건강이 좌우되고 질병이 뒤따른다. 아이들이 20년간 주일학교에 있었던 습관은 캠퍼스에서 3%라는 질병이 된다. 이 통계가 충격적인 것은 팬데믹이 선언되기 이전의 통계이기 때문이다. 왜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서 영혼의 질병에 걸렸는가? 그 답은 주일학교가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어떤 영적인 음식을 먹었느냐에 달려 있다.
  •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면 아이들을 온실 속 화초로 키울 것이 아니라 눈보라와 비바람에서도 견디는 소나무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 아이들과 대면하는 1시간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 1시간이 쌓이면 한 아이는 주일학교 울타리에서 1천 번의 주일을 보내게 된다. 정말 엄청난 사역이 아닌가?
  • 어떤 메뉴로 집밥을 만들어야 할지 함께 고민하자. 교사들 손으로 바꿀 수 있는 대안, 그것이 둘도 없는 중요한 매뉴얼이다.
  •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삶을 은혜로 풍요롭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매주 아이들이 교회에 오는 것은 ‘차려진 밥상’과 같다. 그 배움의 밥상 위에 의미와 흥미를 담아내는 것이 우리 몫이다. 교회교육은 그 1시간에 모든 것을 걸어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기회이기에 양보할 수 없고, 이 시간을 대예배로 간주하고 준비해야 한다.
  • 아이들의 시선으로 우리의 주일학교를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우리는 밥상을 정성스럽게 차리고 있는가? 아이들은 그 1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가? 아니면 부모나 교사들을 위해 ‘나가 주는’ 곳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1시간에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밥상을 차려야 한다.
  • 일주일에 1시간 동안 교회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5년 후에는 어떤 기대치를 가지는가?
  • 주일학교가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한 아이가 10년이면 520번 주일학교에 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한 아이의 10년을 어떻게 내다보고 가르칠 준비를 하는가? 시간의 양(量)에 질(質)을 탑재하는 과정은 교회교육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 아이들이 진심으로 목말라하는 것은 관심과 애정이다. 아이들의 일주일 스케줄을 떠올려 보자. 일주일의 시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받는 관심과 애정이 아이들에게는 ‘산소호흡기’와도 같을지 모른다.
  • 아이들은 자신을 신뢰하고 자존감을 높여 주는 어른 두 명만 있어도 결코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32 산소호흡기의 역할을 결코 학교와 학원이 해 줄 수 없다. 담당 교역자와 담당 교사 두 명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도 아이들에게는 산소호흡기가 있는 셈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만 잘 감당해도 아이들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갈 희망을 붙잡는다는 연구 결과는 정말 가슴 떨리는 숭고한 우리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효율이다.
  • 주일학교를 개선하기 위한 투자와 환경, 예산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주일학교의 예산이 얼마인지, 교육 철학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산소호흡기가 있는지 여부이다.
  • 이렇듯 주일학교는 유리한 점들이 많다. 그러나 주일학교 원래의 사명을 망각한다면 아이들은 영적으로 질식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둔다면 당장 이번 주부터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다.
    교사는 공과공부라는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버팀목이다. 교육학자들이 제시하는 내용을 이번 주에 바로 써먹어 보자.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의 말을 최대한 존중하며 경청하자.
    아이들의 말을 듣는 방법을 다섯 가지 단계로 제시한 ‘SOLER의 법칙’이 도움이 될 것이다. 부디 이 법칙을 마음에 새기고 아이들을 대하기를 바란다. 당장 오는 주일부터!
  • ? 주일학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 아이들은 주일학교에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 앞으로 우리의 계획은 무엇인가?

  • 연령에 따른 인식과 접근 방법은 다르다
  •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들지만 아이들이 배움을 경험하는 최적의 방식은 ‘놀이’다.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아이들의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이 그림을 보고 가정이나 교회에서 얼마만큼 아이들과 이런 놀이를 했는지 생각해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들과 피부를 맞대고 체온을 느끼기보다 스마트폰을 쥐어 준 것은 우리 자신이다.
    아이들에게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거룩’이고, 놀이를 하는 것은 ‘세속’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교육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가정과 교회에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아이들로 붐볐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아이들의 연령 발달을 참고하면서 교육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 보자
  • 주일학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전문가가 된 교육학자의 연구 결과를 얼마나 공감하고,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말씀과 기도에만 충실하다면 연령별 특징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태도와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 능력 있는 교사란 예배 시간에 떠드는 것을 통제하는 교사가 아니다.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교사이다. 연령별 발달 과정을 참고한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별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돌아다니더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반응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인지할 때 교사는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 인식의 차이는 결과의 차이를 낳는다. 이 연구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배속의 아이도 주일학교의 연장선상에서 교육해야 하고, 말을 못하는 아기들에게도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태아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갓난아기들은 말을 못하므로 ‘교육’의 영역에서 배제되기 쉽다.
  • 우리의 기준으로 예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연령의 아이들 기준에서 예배가 무엇인지 확신과 인식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공감하겠지만 이 시기의 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산다. 어른을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 질문, 놀이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의미일 확률이 높다. 그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거절이 쌓이면 수치심은 물론이고 주도적인 추진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능동적 자세를 갖는 것은 어른들의 사소한 판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항시 기억해야 한다
  • 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례로 〈쉐이커스〉라는 단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해당 단체는 초등학생을 비롯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여름과 겨울에 역동적인 집회를 하는 것을 주요 사역으로 삼고 있다.
  • 쉐이커스 사역 초기에는 격주 토요일마다 학교에 가지 않던 날을 사역의 기회로 삼아 ‘놀토캠프’를 개최했다. ‘놀토’라는 명칭으로 시작을 했으니 주 5일제가 시작되던 2005년 즈음부터 시작해 역사가 꽤 오래되었고, 그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단체의 젊은이들은 놀토마다 주일학교가 없는 곳으로 찾아가 아이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한다. 주일학교가 없는 곳이라면 당연히 아이들도 많지 않은 곳이다. 그 젊은이들의 열정과 함께 잊히지 않았던 것은 인상적인 인원 비율이었다.
  • 청년 교사와 아이들의 비율이 어떤 날은 13대 2, 어떤 날은 19대 4가 되었다. 2명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13명의 교사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4명의 아이들을 만나려고 19명의 교사들이 전국으로 향한다. 우리는 보통 그 비율이 반대일 때 익숙하다고 느낄 테지만 그들은 그렇게 움직였다.
  •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가? 2명의 아이에게 13명의 교사가 찾아와 자신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놀아 주며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아마 그 소수의 아이들이 느낀 감동은 평생 남을 것이다. 이처럼 교사들의 진정성을 통해 예수님을 받아들일 통로가 생긴다.
  • 이제 생각을 바꿀 때이다. 아이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위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히려 한 아이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한 아이를 위해 여러 교사가 힘을 합쳐 말씀을 준비하고 놀이를 진행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교회 밖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누가 보더라도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친히 이 땅에서 놀토캠프를 여셨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고백한다면 한 아이를 위해서 예배를 준비하고, 성경을 전하려는 교사들의 마음에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 교사가 아무리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해도 청소년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억하라. 청소년들에게 산소호흡기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사 사역이다. 인정에 목말라 있는 아이들은 인정이라는 밥을 먹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 청소년들을 위한 신앙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 청소년들에게 신앙교육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고, 알고 있다. 단지 행동으로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들이 답을 표현하게 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들도록 고민해 보자.
  • 교회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청소년들은 목회자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뢰란 이것을 원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다음 세대를 바꾸는 시작은 우리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관점을 바꿔야 관성을 바꿀 수 있다. 아이들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기준으로 따라오기보다 우리가 아이들 기준으로 내려가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 부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인식과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주일학교를 고민하는지에 대한 동기 부여, 주일학교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생각이 변할 때, 비로소 다음 세대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 개인의 인식이 달라졌다면 적어도 내가 담당하는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 그 누구도 내 반의 공과공부를 대신할 수도 없고, 나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만날 사람은 없다.
  • ‘내’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매뉴얼을 만드는 시도를 할 수 있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주일학교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변화를 외치는 소리를 우리가 낼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다.
    주일학교 부서의 매뉴얼을 바꾸는 것을 어느 누가 반대하겠는가? 부서별로 제도의 힘을 키워 나가는 것에 왜 많은 예산이 들겠는가? 우리가 일으키는 변화가 아이들의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데에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사들과 포지션을 나눠 보자

  • 주일학교 교사들은 아이들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효과적이고 지혜롭게 학부모를 대하느냐가 신뢰의 핵심이다.
  • 교사 자신은 가르치는 직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 교사로서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헌신자
  • 교사 역할을 감당하면서 지치거나 마음이 상한 경우에 부서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기도 하다
  • 교사는 모범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 실수가 없는 공동체가 안전한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그것을 어떻게 개선하고 서로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가 하는 노력이 건강한 공동체다.
  • 교사와 주일학교 아이들의 포지션은 어떠해야 할까?
  • 교사와 아이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두 단어는 ‘친구’와 ‘멘토’다. 아이들은 마음이 내켜야 움직인다. 따라서 강요가 아닌 설득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이들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는다.
  • 아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관계’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뒷모습을 통해서 배운다.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관계다. 아이들과 친구가 되려는 노력이 없다면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벽한 공과공부를 인도한다고 해도 아이들 마음속에 남는 것이 없다고 보면 정확하다.
  • 또한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장 큰 요소는 공과공부가 아니라 함께 예배자의 본을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설명하라’가 아니라 ‘보여주라’고 지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부서에서 아이들이 처한 가정 환경을 잘 파악하고, 그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 무릎을 꿇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 주일학교의 사명도 궁극적으로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서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부서 안에서 연결하는 통로다. 주일학교 교역자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일학교와 하나님을 이어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교사들도 하나님과 아이들이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다. 부서의 주인공과 스타는 담당 교역자나 교사가 아닌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 가령 내가 예전에 맡았다고 해서 마치 자신의 소유인 양 현재 담당 교사가 있는데도 아이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은 청지기를 벗어난 태도다.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순간이 교사가 사명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이런 동기가 빗나간다면 교사들이 자신의 지갑을 열어서 아이들을 위해 지출하는 것도 불순한 의도가 될 수 있다.
  • 바울의 표현처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물을 주는 사람이 있지만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물을 주었다면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믿음이다. 씨를 심고 물을 주었지만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 교사의 ‘품격’이 생겨야 주일학교의 ‘품질’이 높아진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교사를 확보하는 것보다 준비된 교사가 더 많은 아이를 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교사의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아이들을 위해서다.
  • 주일학교가 교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주일학교를 위해 있다. 그렇다면 교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羊)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심정으로 맡아야 한다. 주 1회 이상 아이들과 교감이 없거나, 부모와 소통이 없다면 그 교사는 아이들의 목자가 아니다.
  •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며, 제도는 본질을 유지하는 장치다. 따라서 부서는 이런 행동들을 제도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고, 가정에는 신뢰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평소 성실함의 결과다.
  • 예배를 디자인하자
  • 이번에는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본질은 바뀌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에 맞는 형태로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고민해 볼 것이다. 교회교육의 시작과 끝은 예배에 달렸다. 교회교육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예배를 정립해 보자.
  • 먼저 예배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은혜로의 초대’라는 부분을 살펴보자.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값없이 은혜로 부르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구원의 방편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구원관은 은혜에서 시작한다.
  •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예배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이며,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예배자가 된다. 이것을 가르치지 못하면 마이크를 잡고 폼 잡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하기 쉽다.
  • ?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방편이 스피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중요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메시지이다. 아무런 메시지를 접하지 못하고 완성도 높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연주를 듣는 것과 베토벤의 신앙을 듣고 난 후 약간 부족한 연주를 접하는 것을 비교한다면 후자가 주는 감동이 훨씬 크다. 예배는 공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배란,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을 건네는 방법은 설교라는 강론을 통해서이다.
  • 교회 방침
    ? 메시지 방향
    ? 설교와 공과의 연계
  • 설교를 듣고 난 후 그것을 ‘내 언어로’ 한 줄 요약을 시도해 보자. 핵심은 두 가지다. 반드시 내 언어라야 하고, 한 줄이어야 한다.
  • ? 설교를 어떻게 이해했니?
    ? 설교에 궁금한 점은 없었니?
    ? 설교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 활발하게 피드백을 주고받는 조직일수록 건강한 공동체임이 분명하다. 귀를 활짝 열고 더 많은 피드백을 주고받는 공동체를 만들자. 단, 표현할 때는 예의를 갖추고 지켜야할 선을 넘지 말아야 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 주일학교 설교는 관념이 아니라 학습 전이를 통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이것을 고민했을 때, 문답의 항목을 암기한다는 것은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없다.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에 했던 말을 반복한다. “바보야. 문제는 520번이라니까.” 우리는 아이들의 520번의 주일을 위한 고민을 해야 한다. 매주 고민하는 작은 사고력의 조각들이 초등학교 기간 동안 300개의 이런 퍼즐 조각을 모으는 것이다. 10년이면 520개 사고의 ‘편린(片鱗)’들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찮은 내용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교회교육은 한 아이의 인생을 세워 나가는 숭고한 사명이다.
  • 매주 해치우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방식과 이런 고민이 차곡차곡 쌓이는 주일학교를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 아이들은 어떤 형태의 분반을 원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배움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원인은 아이들이 세상의 문화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적어도 고민하는 교사라면 우리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아이들이 학습할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 학습은 획일적이 아니라 개인별 관심과 속도, 흥미를 기반으로 할 때 성취가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 한 아이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서가 믿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한 아이가 성경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서가 이런 부분의 교육을 포함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 교육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면, 개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위한 준비는 오히려 교회가 더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 ? 교사의 역할은 당장 티가 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티가 안 날 수도 있다.
    ? 교사는 지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신념)으로 가르친다.
    ? 교사가 바라보는 소망은 아이들의 미래다.
  • 사람 사는 곳에서 갈등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을 세우고, 함께 공유할 가치를 자주 상기해야 한다.
  • SMART
    S(Smile) 언제나 미소로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
    M(Meeting) 매주 아이들과 대면/ 비대면으로 접하는 교사
    A(Attending) 예배에 빠지거나 지각하지 않는 교사
    R(Respectful) 아이들을 존중하는 교사
    T(Trustworthy) 약속을 잘 지키는 교사
  • 아이들에게 ‘무엇’만 강요했을 뿐, ‘왜’ 그것을 접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기 때문이다.
  • 이미 20년 전부터 다음 세대는 주일학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둘러싼 외부의 환경 탓도 있겠지만 더 큰 요인은 내부에 있다. 그중에서도 교사들의 열정, 주일학교 예산과 같은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은 주일학교에서 정확한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복음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면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복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 적어도 주일학교라면 아이들에게 정확한 구원의 확신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산과 구조와 환경을 탓하기 이전에 주일학교의 기본 중의 기본에 해당된다. 한 아이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가르칠 수 없다면 다른 환경으로 개선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주일학교는 본질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 주일학교 아이들은 복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정말 아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 구원 = 교회 출석
  •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십자가를 계획하셔야 했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야 했고, 우리는 왜 구원이 필요한가. 이런 내용을 알고, 믿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확실한 것이며,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확한 구원의 확신을 가르치고 있는가?
  •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고 인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다.
  • 초대교회는 양적 성장을 하기보다 본질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실히 세웠고, 그 정체성에서 오는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교회가 사회에 주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었다.
  •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은혜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행위이고, 그의 은혜로 인간을 초대하는 현장이다. 따라서 복음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을 교회교육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 『구원으로 가는 9개의 이야기 계단』1
  • 교리 = 믿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
  • ? 교육의 최종 목표는 성경이어야 한다.
    ? 아이들은 타고난 학습자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 아이들이 스스로 표현하도록 해 보자.
  • 아이들이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가르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신학 개념이 아니라 맥락에서 상상하여 표현을 회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