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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숨결이 바람 될 때
ch5rong
2025. 2. 12. 15:41
- 콘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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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순간, 하나의 정점이 있다. 쌓이고 쌓인 경험들이 삶의 세부사항들에 의해 마모되어버리는.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현명해지는 순간이다.
- 졸업이 가까웠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아 여기서 공부를 끝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하여 도덕적인 견해를 세우려면 그 문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경험을 더 많이 쌓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무게감을 잃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했다.
- 해부실 환경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즉 의사들은 사체 기증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증자들은 실제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 해부실에서 우리는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여, 문자 그대로 장기, 조직, 신경, 근육으로만 바라보았다. 실습 첫날, 나는 시체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지의 피부를 벗겨내고, 작업을 방해하는 근육을 가르고, 폐를 꺼내고, 심장을 잘라서 열고, 간엽을 제거하고 나면 이런 조직 더미를 인간으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시체 해부는 신성 모독이라기보다는 해피 아워8에 술 마시러 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이런 깨달음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쩌다 한 번씩 반성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시체들에게 사과했다. 죄의식을 느껴서가 아니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 의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의미, 삶, 죽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고, 그런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 눌랜드의 책을 비롯해 여러 기록들을 보니 죽음이란 직접 대면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책을 읽고 객관식 문제에 답하는 건 행동을 취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 “우리는 어느 날 태어났고, 어느 날 죽을 거요. 같은 날, 같은 순간에.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앉아 아기를 낳고, 빛은 잠깐 반짝이고, 그러고 나면 다시 밤이 오지.”
- 어떻게 하면 의사다운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앞으로 실제적인 의학을 더 많이 배워야겠지만,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지식만으로 충분할까? 물론 지능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도덕적 명확성 또한 필요했다.
- 앞으로 내가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얻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내게 맡겨진 역할, 즉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시간과 방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 서로를 위해 자기 자리를 잘 지켜줘야겠지만 필요할 때는 꼭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 레지던트로서 내가 꿈꾸었던 가장 높은 이상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 가족들에게 그들이 기억하는 사람(온전하고 생기가 넘치는 독립적인 사람)은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환자가 어떤 미래를 원할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했다.
- ‘이제부터 우리는 함께입니다. 여기 헤쳐 나갈 길이 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회복의 길로 인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 뇌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뇌에서 생겨나는 원발암(primary cancer)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다른 부분, 흔히 폐에서 옮겨 오는 전이암(metastatic cancer)
- 상세한 통계 자료는 학술회의에나 어울리지 병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 이런 순간에 환자와 함께하는 건 분명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왜 내가 이 일을 하는지,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생명(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정체성, 어쩌면 다른 이의 영혼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을 지켜줘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이 일의 신성함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담감은 의학을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 브이는 늘 정직하게(때로는 겸손하게) 전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 “오늘은 이 모든 게 가치 있어 보이는 첫날이야.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아이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견뎌내며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은 그 모든 고통이 가치 있어 보이는 최초의 날이야.”
- “지금은 빨리 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 잘하는 법은 나중에 배우면 되니까.”
내일로 미룰 수 있을까?
안 될 말이지.
한숨이 나왔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 최고참 레지던트가 되자 나는 거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했고 성공과 실패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주어졌다. 실패하면 괴로웠고,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기술에 정말 많은 게 걸려 있거나, 불과 1~2밀리미터 차이로 비극과 성공이 갈릴 때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책 전체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
- “형은 참 많은 걸 이뤘어. 형도 잘 알잖아.”
- 내 몸과 거기에 속한 내 정체성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 환자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나를 몰아붙이던 그 의무가 사라지자 나 자신이 어느새 병약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마치 있는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한 후 쓰러지는 달리기 선수처럼.
-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 희망(hope)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영어에 등장한 건 약 1,000년 전으로, 확신과 소망을 결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체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 에마가 자주 하는 말을 인용하자면, 내 가치를 찾는 건 내게 달린 문제였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선 그 말이 공허한 핑계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도 환자에게 구체적인 시간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환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생사가 걸린 결정을 어떻게 내릴 수 있겠는가? 그때 문득 내가 저질렀던 실수들이 떠올랐다.
- 불치병을 진단받고 나서 나는 두 가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죽음을 의사와 환자 모두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 내가 생각하는 의사의 일이란 두 개의 선로를 잘 연결해서 환자가 순조로운 기차 여행을 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혼란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1
-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 환자와 다시 접촉하면서부터는 이 일의 의미도 되찾을 수 있었다.
- 몸이 고통스러울수록 성취감은 더욱 커졌다.
- 병을 앓으면서 겪게 되는 종잡을 수 없는 건 가치관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환자가 되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려고 계속 애를 쓰게 된다
- 내가 슬픔의 5단계(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를 이미 다 겪었지만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찾아내야 해요.’
- 신경외과의를 겸한 신경과학자로 가장 높이 날아오르려던 욕심을 버린다면,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아버지가 되는 것?
신경외과의가 되는 것?
후학을 가르치는 것? - 내가 바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히포크라테스나 마이모니데스, 오슬러도 가르쳐주지 않은 뭔가를 배웠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 내가 외과의로서 얼마나 오만했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최대한의 책임감과 권한으로 환자를 돌보려 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책임이고 덧없는 권한이었다.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기면, 환자는 깨어나 몸에 삽입했던 관을 제거하고 퇴원한다. 이렇게 병원을 떠난 환자와 가족은 계속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신경외과 의사의 메스가 뇌 질환을 해결하듯이, 의사의 말은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불확실성과 병적 상태는 환자 본인이 계속 씨름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에마는 나의 옛 정체성을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 물론 나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현실을 생각하면 맹목적인 결정론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 나는 의사에서 환자로, 주체에서 객체로, 주어에서 직접 목적어로 돌아왔다.
- 내 요구를 들어준다는 건 그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난처하게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 결국 의사도 희망이 필요한 존재였다.
- 오늘과 내일을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어에서 우리는 시간(time)이라는 단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지금 시각(time)은 두 시 사십오 분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힘든 시간(time)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요즘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기력해졌고, 더 너그러워진 것 같다. 수술대 위의 환자에 집중하던 외과의 시절에, 시곗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의미 없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이 몇 시인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료 훈련은 철저하게 미래 지향적이며, 나중의 큰 보상을 위해 현재의 유혹을 참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5년 후에 뭘 하고 있을까 늘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5년 후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건강할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점심 식사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 - 나는 지금 어느 시제에 살고 있는가? 현재 시제를 넘어 과거 완료 시제로 들어섰나? 미래 시제는 공허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입에 올리면 귀에 거슬린다.
-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 “정말 저 애답구나.”
- 점점 악화되는 암으로 살인적인 피로를 느끼면서도 완화치료를 받는 동안 그가 제일 신경 썼던 건 집필에 필요한 정신력의 유지였다. 그는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 불치병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 폴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 폴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폴은 비극이 아니었다.
- 폴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거의 매순간 그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우리가 여전히 함께 만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 어떤 주제로도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글이나 쓰지 않았다. 그는 시간에 대하여, 그리고 병에 걸린 자신에게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썼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폴의 글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에 사무친다.
-알라딘 eBook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