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 우리는 이 단어가 원래 가지고 있는 명백한 의미를 고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제자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안디옥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 다툼(quarrelling)이란 상대방의 그름을 밝히려는 행동
- 우리가 이 해, 이 달, 아니 바로 오늘,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스스로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실패에 대해 온갖 변명을 둘러댑니다.
- 저도 여러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 또한 자연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 사실을 지적하는 순간 엄청나게 많은 변명거리들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그 변명거리들이 그럴듯하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변명거리들이야말로, 싫든 좋든 우리가 자연법을 얼마나 깊이 믿고 있는지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바른 행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르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렇게나 변명거리를 찾느라 노심초사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바르다’는 가치를 아주 깊이 믿고 있기 때문에—자연법의 압력을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자신이 그 법칙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어떻게든지 책임을 전가하려고 애를 쓰는 것
-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결론은, ‘바른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 때문에 종종 자연적인 ‘행동 법칙’이란 없다는 의심을 하게 되긴 하지만, 사실은 이런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그런 ‘행동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반대의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
- 인간의 행위라는 일상적 사실들 너머에는 아주 명백하게 실재하는 무언가?우리가 만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압박하는 실재적 법칙?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겠습니다.
-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말하는 ‘생명력’이 정신을 가진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 만약 ‘그렇다’면, ‘생명을 존재케 하고 그 생명이 완전해지도록 이끄는 정신’은 바로 하나님이며 따라서 그들의 관점은 종교적 관점과 똑같습니다.
- 종교의 감동은 전부 누리면서 그 대가는 하나도 치르지 않겠다는 것
- 우리는 모두 진보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보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곳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원하는 곳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러니까 그 경우에는 가장 먼저 되돌아가는 사람이 가장 진보적인 사람인 셈이지요.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 하나님을 선악의 구분 너머의 존재로 보는 관점—을 우리는 ‘범신론’(Pantheism)
- 범신론자는 인간이 제 몸을 움직이듯이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즉 우주 자체를 하나님과 거의 동일시하면서,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주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일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 성적 부패는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 그는 무엇을 하려고 세상에 온 것입니까? 물론 그는 가르치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나 다른 기독교 저술들을 살펴보면, 무언가 다른 일?그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음식이 어떻게 영양분을 공급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밥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어떻게 효력을 갖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도 그 일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 일이 어떻게 효력을 갖는가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이 모든 효력을 갖게 되느냐에 대한 이론들은 제가 볼 때 아주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그 이론들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령 도움이 된다 해도 실물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되는 도식이나 도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굴욕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당신께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당신께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와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다른 이름?성만찬, 미사, 주의 만찬?으로 부르는 신비한 행위가 그것
-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얻은 생명을 지키는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자기의 동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생명을 보살피고 보호할 수 있을 뿐입니다.
-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절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도까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 해 주므로?이라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 볼 기회를 얻었고 그래서 그를 믿을 수 있게 된 사람들만 이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불공평한 일 같지 않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만 그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이 자기는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이 유기체를 통해 일하십니다. 이 몸의 구성원이 하나씩 더 생길 때마다 그는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돕고 싶다면,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한 세포가 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몸을 불려 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내 놓고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3. 그리스도인의 행동
- 우리가 아직 고려하지 않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선단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 이 악단이 연주하고자 하는 곡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리 악기들이 전부 잘 조율되어 있고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냈다 해도 춤곡을 연주해야 할 상황에서 장송곡을 연주했다면, 그 연주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 선단이 아무리 순조롭게 항해했다 해도 뉴욕에 가야 할 배들이 캘커타에 도착했다면, 그 항해는 실패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도덕에 관해 생각할 때에는 이 세 가지 분야를 모두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 각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들, 인간과 인간을 만든 힘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분야에서는 우리 모두가 협력할 수 있습니다. 불일치는 두번째 분야에서 생겨나 세번째 분야에서 좀더 심각해집니다. 바로 이 세번째 분야에서 기독교의 도덕과 비기독교의 도덕 사이에 주된 차이가 생겨납니다
- ‘분별력’(Prudence)이란 실생활에 적용되는 양식(良識, commonsense)을 뜻하는 말로서, 자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 목회자는 ‘인간은 앞으로 영원히 살 피조물’이라고 볼 때 필요한 일들을 돌보기 위해 전체 교회 가운데 따로 구별되어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 우선 성경은 그 사회에 놀고먹는 사람이나 빌붙어 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모든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하며, 더 나아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 저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되뇌일 수 있지만,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좀더 내면적인 문제로?사회적인 문제에서 종교적인 문제로?먼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빨리 집에 가는 길입니다.
- 즉 원재료를 아무리 향상시킨다 해도 그것과 다른 문제, 즉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뒤로 미룰 것인가를 자유롭게 결정해야 하는 진정한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로운 선택은 도덕이 관여하는 유일한 영역입니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지요.
-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치료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도움을 원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 물론 완벽한 순결은—완벽한 사랑처럼—단순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지속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지속될 수 있으며 원칙도 지속될 수 있고 습관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것
- 소설이나 연극이 제공하는 또 다른 개념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 홍역처럼 우리 의지와 상관 없이 찾아오는 일이라는 것
- 용서하는 법을 정말 배우고 싶다면(모든 성패는 용서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게슈타포보다는 좀더 쉬운 대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지난주에 내게 잘못한 행동이나 말을 용서하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
- 얼마나 교만한지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 행세를 할 때 얼마만큼이나 싫은 마음이 드는가?”
-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합니다
-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
-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자신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끊임없이 경건한 감정만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살 수 있다 해도, 감정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will)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will)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곧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30)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사랑의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감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또 우리에게는 이런 감정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 믿음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art)입니다. 기분은 이성의 생각과 상관 없이 변하는 법입니다.
- ‘겸손해지는 첫 단계는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 기독교의 덕목들을 실천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해 보는 것’
-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 여러분이 삶의 매순간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원래 그분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일정한 특성을 가진 피조물이 되느냐?그의 의도에 맞는 피조물이 되느냐, 일정한 방식으로 그와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지켜 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해 보는 것(그래서 실패해 보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실천하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자기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닮아 가게 해 주신다는 사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
4.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데서만 멈춘다면, 그 장교의 사막 경험보다 생생하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수백 명의 경험?여기에 비하면 여러분과 제가 혼자 경험하는 흥분이나 경건한 감정들은 아주 초보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개념?여러 가지가 뒤섞인 해롭고 낡은 개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
- 그리스도인은 생생하면서도 역동적인 사랑의 활동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이 활동이 모든 것을 창조해 냈다고 믿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인간을 통해?특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역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영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어 온 사랑입니다.
-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든 생명이 아니라 낳은 생명,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생명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에 동참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가 성부를 사랑하시듯 성부를 사랑할 것이며,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제 표현대로라면 ‘좋은 전염’을 시키기 위해?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
- 여러분과 그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관으로서 각기 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서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하며 무관심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가 여러분과 다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유기체의 일부임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여러분과 같은 유기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여러분은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반면에 그가 여러분과 다른 기관이라는 것을 잊을 때,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획일화시키고자 할 때, 여러분은 전체주의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체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 우리는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면서 그릇된 두 생각 사이에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중 하나에 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던 젊은이가 사실은 자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교회에 그만 다니기로 할 경우?부모를 속썩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정직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할 경우?그리스도의 영은 그 전 어느 때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 아기가 처음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는 젖 주는 사람이 어머니인 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도 처음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그 뒤에 계신 그리스도를 못 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아기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도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 밀을 생산하고 싶으면 흙 표면이 아니라 더 깊숙한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완전히 갈아엎어져서 새 씨가 뿌려져야 합니다.
- 여러분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온전함을 요구하시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잘 안 되어 낙심하거나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노력으로는 온전함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 지금 여러분을 인도하기 시작하신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는 절대적인 온전함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그 목적지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막을 세력은 전 우주에 오직 여러분 자신뿐입니다. 온전해지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길 바랐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어떤 존재로 만들고자 하셨느냐
-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야 하며, 그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분께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다워집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크신 분인지, 저마다 다른 수십만억 명의 ‘작은 그리스도’로도 그분을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나 자신’이 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를 거부하고 혼자 힘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유전과 성장배경과 환경과 자연적인 욕망의 지배만 더 받게 될 뿐입니다.
-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아를 통째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 자아(그리스도의 것이면서 동시에 여러분의 것인 자아, 그의 것이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러분의 것이 된 자아)는 그 자체를 추구하는 한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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